
O.S.T는 내가 아니라 화면을 위해 쓰는 가사다
이번 수업의 첫 문장이 뇌리에 박혔다. 음악이 영상보다 강하게 들리면, 그건 이미 잘못된 O.S.T라는 것. 지금까지 배운 가사 쓰기는 전부 ‘내 감정을 어떻게 잘 표현할까’였는데, O.S.T는 반대였다. 등장인물의 대사와 행동 흐름을 방해하면 안 된다. 음악이 주인공이 아니라 영상과 어울리는 음악이 되는 게 먼저다.
처음엔 이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내 개성을 죽여야 하나 싶어서. 그런데 곱씹어보니 오히려 더 어려운 작업이었다. 내 감정이 아니라 남의 감정을, 그것도 아직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 속 인물의 감정을 대신 상상해서 써야 하니까. 드라마는 대본이 1~2회분밖에 안 나온 상태에서 결말도 모른 채 곡을 붙여야 한다는 걸 배우고 나니, 그동안 드라마 볼 때 무심코 흘려들었던 O.S.T들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시놉시스부터 테마까지 — 순서를 지켜야 하는 이유
수업에서 정리해준 순서는 이랬다. 시놉시스 파악 → 인물관계도 분석 → 장르와 대본 분석 → 영상 색감과편집 파악 → 테마 선정 → 음악 장르와 가사 소재 선택. 처음엔 그냥 절차처럼 느껴졌는데, 직접 해보니 이 순서를 건너뛰면 안 되는 이유를 알게 됐다.
테마를 먼저 정하고 인물을 나중에 보면, 가사가 붕 뜬다. ‘누구의 테마인지, 어떤 상황의 테마인지’를 정하는게 맨 마지막인 이유가 있었다. 인물을 먼저 알아야 그 인물이 낼 법한 말투와 감정의 온도를 알 수 있고, 그래야 진짜 그 캐릭터의 목소리 같은 가사가 나온다. 캐릭터 중심으로 쓸지, 이야기 전체의 메시지를 담을지도이 단계에서 갈린다.
한 남자가 아내를 잃고 일상을 지내야 하는 마음을 담았다 — 네가 지워져
우연히 예능을 보다 한 남자의 사연을 들었다. 연습 삼아 짧은 가상 시놉시스를 하나 만들었다. 아내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남자는 아내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 목소리, 체취…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아내의 얼굴이 희미해진다. 남자에게는 아내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도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아내가 점점 지워지는 현실이었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사람. 녹화된 동영상 속 아내의 얼굴과 목소리를 잊지 않기 위해 그는 같은 영상을 보고 또 본다.
캐릭터를 정하고 나니 소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내가 떠난 지 오래지만 차마 그녀의 물건들을 정리하지못했다. ‘옷장 한쪽엔 아직 네 계절이 걸려 있어’, ‘내 사랑은 그대로인데 너만 흐려져’ 같은 구절이 여기서 나왔다. 처음엔 이 남자가 결국 시간 앞에서 담담히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가사를 써나가다 보니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 이 남자는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사실은 잊혀지는 게 무서운 사람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아픔이 옅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그 아픔이 옅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아픔이야말로 아내가 아직 자신 곁에 남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로는 “네가 흐려져서 슬프다”고말하지만, 서브텍스트로는 “이 슬픔마저 사라지면 너정말 없는 사람이 된다”는 두려움을 감추고 있었다. 이번에도 텍스트와 서브텍스트가 핵심이었다.
브리지 한 줄 — “아픔은 데려가면서 너까지 데려가”
가사를 쓰면서 가장 공들인 부분은 역시 브리지다.
시간은 참 이상해 아픔은 데려가면서 너까지 데려가
앞서 두 번의 Chorus에서는 “너를 잊는 건 오늘도 처음이야”라며 매일 새롭게 아파하는 화자였는데, 브리지에서 그 아픔의 정체를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본다. 시간이 흐르면 아픔은 옅어진다고들 하지만, 이 화자에게 그건 위로가 아니다. 아픔이 옅어진다는 건 곧 ‘너’라는 존재도 함께 옅어진다는 뜻이니까. 시간이 주는 치유와, 시간이 앗아가는 상실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이 역설이 이 곡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O.S.T 수업에서 배운 텍스트와 서브텍스트로 보면, 텍스트는 “시간이 참 이상하다”는 담담한 관찰이지만, 서브텍스트는 “차라리 이 아픔이라도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아픔이 사라지길 바라면서도, 동시에그 아픔이야말로 ‘너’를 붙잡아두는 마지막 끈이라는 걸 화자는 알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무디게 만들어주는게 고맙지 않고 오히려 두렵다. Final Chorus의 “붙잡을수록 더 멀어져”라는 구절도 이 지점에서 다시 읽힌다. 잊지 않으려 애쓸수록 오히려 더 빨리 흐려지는 그 아이러니를, 화자는 이미 브리지에서 예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Verse 부분은 “고개를 떨궈”,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처럼 화자의 반응 위주로만 흘러가는 편이라, 아내(혹은 그 사람)의 구체적인 한 장면—예를 들어 마지막으로 함께 보낸 계절이나 특정 순간—이 하나쯤더 있으면 감정이 훨씬 입체적으로 살아날 것 같다. 그래도 “아픔이 지나가면 사람도 지나간다”는 이 역설 하나만으로도, 이번 곡은 슬픔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